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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인터넷 인물 박건희씨 29세로 요절한 ‘한국 문화 전도사’ / 1995년 12월 28일 경향신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개인사진전 「이미지, 이미지전」을 열어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박건희씨(사진). 인터넷의 가상공간을 예술적인 향기로 채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그는 지난 10월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다.「인터넷 전도사」「인터넷 예술가」로 불렸던 박씨. 그는 지난 3월 웹사이트 구축 대행회사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차려 다양한 문화 예술 사이트를 선보였다. 「버츄얼 갤러리」「서울국제 만화 페스티발 95」「광주 비엔날레」「한국 패션 넷」등.
그는 인터넷이 단순히 정보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화면구성을 통해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미술관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서구문화가 중심이던 인터넷에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해 우리의 실력을 세계에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개인전 작품은 영국의 예술계간「 인터알리아스」에 소개됐고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이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국 포인트 커뮤니케이션사가 선정하는 세계 우수 웹사이트 5%안에 추천됐다. 또 10월에는 나우콤 웹사이트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네티즌 뿐 만이 아니다. 사진작가로서 그의 능력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도 요절을 슬퍼했다. 그는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한 작가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개인전을 열 정도로 당돌하고 열성적인 인물. 독특한 감수성을 인정받아 가수 이문세씨의 7집과 캐럴집, 작곡가 이영훈씨가 러시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그리운 금강산 등 클래식 소품 1ㆍ2ㆍ3 집의 재킷을 직접 제작했다.

이씨는 <건희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늘 즐거운 기분 이었다> 며 <그의 밝은 모습과 작품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돼 무척 아쉽다> 고 말했다. 그가 죽기 전 일기장 겉장에 남긴 시어처럼 한국 네티즌의 기억속에 오랫동안 새겨질 것이다.

91년 8월에는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가수 노영심씨와 함께 「박건희 초대전과 노영심의 음악회」 를 열기도 했다. 작은 공간 안에서 바람이 흩날리고 노영심ㆍ김형석씨가 신디사이저로 음악을 연주하면서 노래와 대화를 통해 향수에 젖은 분위기를 자아내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다양한 사물을 통해 공통된 하나의 느낌을 전달한다는 평을 받았다. 고속도로나 숲속, 고양이, 여성 등을 찍으면서도 꿈속에서 보았던 그리움과 아련한 추억과 향수ㆍ두려움 등이 화면에 나타난다.
박씨를 지도했던 한정식교수는 『일찍부터 자신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어 가르칠 것이 별로 없었다』며 『사진을 통해 사물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 올리는 탁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런 박씨가 인터넷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 유학 시절.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고등학교 동창 이재웅씨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인터넷은 특별한 전시공간 없이도 시공을 초월해 작품을 교류할 수 있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박씨는 이 공간에 푹 빠졌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한국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이씨와 함께 작년12월 24일 귀국, 다음커뮤니케이션을 개업했다.
이씨는『건희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늘 즐거운 기분 이었다』며 『그의 밝은 모습과 작품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돼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그가 죽기 전 일기 장 겉장에 남긴 시어처럼 한국 네티즌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새겨질 것이다.
『기억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규칙적으로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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