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행술, The art of not landing / 정희승
11회 다음작가상 수상자 정희승 작가가 참여한 단체전입니다.
[전시기간]
2016년 11월 17일(목) – 12월 11일(일)
[전시장소]
케이크갤러리 (서울시 중구 황학동 59번지 솔로몬빌딩 6층)
[관람시간]
11시 – 18시 (월요일 휴관)
[오프닝 리셉션]
2016년 11월 17일(목) 오후 6시
[전시소개]
말 많은 세상이다. 이제는 그 ‘말’로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말의 생산과 유포, 전파가 빠른 시대에 문장은 짧아지고, 단어는 ‘우물가(井)’를 맴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검색창에 ‘문장’을 써넣지 않는다. 조합된 문장보단 파편적인 단어가 더 많은 검색 결과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웹서핑은 물음을 ‘키워드’로 환원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애초의 질문은 제쳐둔 채 검색 목록과 연관 검색어를 늘려가는 것이다. 뉴스를 덮는 뉴스와 타임라임을 밀어내는 타임라인이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새로운 단어를 쉼 없이 우리의 눈앞에 띄워보낸다. 그러므로 키워드가 지나간 트래픽의 수면 위에서 포말처럼 부서지는 건, 우리의 시간뿐만이 아니라 ‘물음’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라고 생각한다”는 대통령(?)의 단언은, 그의 말이 대개 그러하듯 번역하기 난감한 말이었다. 외신들은 이 발언 속 ‘대박’을 제각기 다르게 번역하기 시작했고, 결국 정부는 이를 ‘통일’시킬 말로 ‘보난자’란 그럴싸한 단어를 골라냈다. ‘보난자(bonanza)’는 미국 서부의 채굴꾼들이 ‘노다지’를 일컬을 때 사용하던 단어인데, 통일을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발언의 의도와 노골적으로 상통한다. 이처럼 환원은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성을 반복”1) 하는 정치적 레토릭이자 권력의 오랜 통치술이다. 보난자라는 명명(통일=대박=노다지)이 통일에 관한 여타 다양한 층위의 논의의 가능성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최근의 혐오 발언은 또 어떤가.2) 통치자는 통치 대상을 분류하고 ‘딱지’를 붙인다. 무슨 녀, 무슨 충과 같은 언어적 낙인,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몇 개의 ‘키워드’는,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환원이며 본질 실종이다. 이러한 언어적 규정과 환원의 순환 고리는 대상과 사건을 —환원, 편견, 혐오와 같은— 언어적 ‘손때’가 묻어 있는 하나의 ‘키워드’로 대체해 그 이면을 너무나도 쉽게 망각으로 이끈다.
이 전시는 이처럼 ‘키워드’가 대상의 표면에 완전히 들러붙기 전에, 이미지와 캡션이 서로 단단히 달라붙기 직전에, 그 사이로 침투하여 얇은 ‘막’(veil)을 치고자 한다. 마치, 일식(日蝕)을 육안으로 관찰하기 위해 필름으로 눈 앞을 가리듯이 말이다. 하늘과 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이 불투명한 ‘막’은, 외려 흰 태양과 검은 달의 윤곽을 눈 앞에 드러낸다. 이는 무언가를 직시하기 위해 도리어 그 앞을 가려야만 하는 역설의 은유이자, 확신에 찬 단언 앞에서 다급히 외치는 ‘판단 중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전시는 상황과 인물, 사건 사이에 개입해 이야기의 유동성을 보존하고, 언어의 필연적인 실패에 ‘불확정성’으로 대꾸하고자 한다. 물론 전시에 참여하는 다섯 작가(팀)의 작품이 실제로 언어적 작용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업들은 ‘자극적인 말’ 옆에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물음은 즉답되지 않고, 행위는 일정 자세를 유지하고, 사물은 미완에 머무른다. 하나의 ‘언어’에 ‘안착(landing)’하지 않고 기표와 기의 사이를 끊임없이 배회함으로써 말의 어리석음 또는 오류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규정되지 않는, 그럼으로 미지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불확정적인 것들은, 한 가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을 스스로 배태하고 있기에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목록으로]
![[전시] 끝은 시작이다 / 김윤호](/parkgeonhi/asset/images/button_prev.png)
![[공지] 14회 다음작가상 지원자 포트폴리오 반출 안내](/parkgeonhi/asset/images/button_next.png)